공연
92세, 곧 93세가 되신 할머니는 몇년전부터 치매 초초기 증세를 보이신다. 코로나 이후로는 집 밖에 나오신 적이 10번도 되지 않으며, 예전에 사건은 생생하게 기억하셔도 가까운 일은 10분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다. 몇달 전 할머니보다 두 살 많은 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런 소식을 전하는 게 뭐가 좋겠냐고 하면서…. 그런 과정 속에서 나 역시 기억을 잃어가고 있을 때, 지적 능력이 쇠퇴하고 있을 때 삶의 의미가 무엇일지 고민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어쩌면 남겨진 사람들, 살아가는 사람들에 자기 위안을 위한 것이 아닐까 위험한 질문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근에 읽었던 책(에이징 솔로) 그리고 네이처 오브 포게팅을 통해서,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되었다. 분명 가슴 아픈 순간들도 있지만, 어쩌면 한 순간의 알아차림과 감정의 교류가 그 아픔과 슬픔을 모두 덮어버릴 만큼 위를 행복하게 해 준다. 나에게는 마치 공포 스릴러처럼 다가왔던 ‘더 파더’라는 영화가 치매를 경험하고 있는 누군가의 마음과 감정을 좀 더 이해하게 해 주었다면,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움직임과 표정으로 전달되는 표현을 통해 소중했던 그 순간을, 그리고 그 기억을 되찾으려는 애절한 노력을 잘 보여준다.
만약 나에게 직관적으로 제목을 물어봤다면 ‘기억의 조각들’, ‘깨어진 기억들’, ‘마지막까지 놓치기 어려운 순간들’ 등을 떠올렸을 것 같다. 그래서 더욱, ‘Nature of Forgetting’이라는 제목에 주목이 되었던 것 같다. 망각의, 잊어버림에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를 필요로 하는 기억과 망각의 관계는 무엇일까. 내 뇌세포가 더 이상 예전만큼 충분하게 연결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잊어버릴 수 없는 건 우리 삶의 소중했던(때로는 즐거워서, 때로는 너무나 평범해서, 때로는 너무 가슴 아파서) 순간들이 아닐까. 물론 탐의 기억 속 상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때로는 그 경험들은 (극 중에서는 불안한 음악과 함께) 병합되기도 삭제되면서 일정 부분 왜곡되게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일부 변경이 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의 경험들 -> 어머니가 도와주는 기상, 첫사랑의 순간들, 쪽지를 주고받는 작은 설레임, 학생에서 교육자가 되었을 때, 결혼식의 에피소드 - 이 누군가의 삶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 주었는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마지막 장면이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을 듯 하다. 비록 자켓 하나 혼자 입기 어렵지만, 먼저 사망한 와이프의 이름으로 부르던 딸의 본명을 부르고, 내 삶의 소중한 동반자였던 어머니와 친구를 만나는 그 장면 말이다.
UCL과 협의했을 정도로 뇌와 기억에 관한 고증을 거치는 동시에, 피지컬 시어터로 이 보여주기 위해 배우들이 쏟은 상당한 노력이 느껴져서 작품의 여운이 더욱 깊게 다가왔다. 자전거를 타고, 의자를 든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돌리고, 옷을 던지며 그 기억들을 추억하거나 작품을 고하고… 단지 몸을 탁월하게 잘 쓴다를 넘어, 그 몸동작으로 삶의 여러 순간들의 감정들이 잘 전달되기에 경탄과 감동이 함께 오는 듯 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네이처 오브 포게팅’이 누군가를 돌보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꼭 치매와 관련있지 않더라도, 일상의 다양한 순간들의 소중한 조각들을 많이 남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응원이 되기를 바란다.
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