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술인 - 슬픈 전설의 여인, 천경자
글 - 이지윤 (고양문화재단 큐레이터)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 보는 눈과 체념한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지닌 여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난다. 가슴에 장미 한 송이를 품고, 뱀으로 관을 만들어 쓴 이 여인은 세상을 뒤로 하고 붓을 꺾은 채 살아가다 2년 전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화가 천경자의 자화상이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54세 때 자신의 스물 두살을 회상하며 그린 작품이다. 젊은 날의 슬픈 기억이 여인의 초연한 눈빛에 담겨 있는 듯 하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종이에 채색, 43.5 x 36cm)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는 사람인데, 절필을 선언했던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미 긴 세월 이리저리 마음을 부대끼는 일이 익숙했던 인생이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천경자를 긴 침묵으로 내몰았던 화제의 <미인도>의 진위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 속에 있다.
고흥 군서기로 있던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천경자의 본래 이름은 옥자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소질이 있음을 알아 차리고 일본 유학 길에 오른다. 이 때부터 ‘경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였다고 한다. 유학 중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이어 입선하면서 화가로 데뷔했고, 귀국 후 모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하며 학교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35마리의 뱀이 한데 엉겨 있는 뱀 그림 <생태>로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그림으로 인해 천경자는 단숨에 유명세를 탔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녀는 결혼의 실패와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징그러운 뱀 무더기는 그 가슴 속에 맺힌 한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에게 넉넉히 전하고 있다.
생태, (1951, 종이에 채색, 51.5 x 87cm)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한 화가 천경자는 해외 여행 한 번 나가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세계 각지를 두루 누비고, 머물면서 이국적인 인물화와 풍물화도 그렸다. 주로 꽃과 여인을 소재로 몽환적인 분위기로 자신의 내면적 갈등 세계를 보여주던 천경자는 이후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꿈과 원시적 낭만을 화려한 색채를 담아 냈다,.
그 외에도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천경자 미술연구소를 세우기도 했으며, 베트남 전쟁의 종군화가로 참전하고, 각종 수상과 문화 훈장을 받기도 하며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을 했다.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130×162cm